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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KBEOM CULTURAL FOUNDATION

    삼남지방 순회

    김구가 처음 삼남지방에 발을 내딛은 때는 구한말이었다. 당시 이름은 김창수였다. 김창수는 1896년 치하포 사건 후 살인죄로 체포되었다. 법부에서는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으나 고종은 그의 의기를 높이 여겨 집행을 보류시켰다. 미결수로 인천감리서에 갇혀 있던 김창수는 심사숙고 끝에 탈옥을 결심하고, 1898년 3월에 탈옥하는데 성공해 정처 없는 도망자의 길을 떠났다. 서울을 거쳐 오산・공주・강경・남원・함평・무안・목포・해남 관두・강진 고금도・완도・장흥・보성 득량・화순 동복・담양・하동 쌍계사・계룡산 갑사 등지를 방랑하다가 그해 늦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898년 3월 도망자의 신분으로 삼남지방을 향했던 김창수가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지나온 자취를 찾아 나섰다. 이는 과거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보은의 답방이었다. 1946년 9월 10일부터 10월 4일까지 경남과 전남 일대를 방문했으며 가는 곳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주에서 시작된 삼남지방 순회는 부산・진해・한산도로 이어졌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김구의 추앙은 각별하여 한산도 제승당을 방문했을 때 충무공 영정에 참배하였다. 실제 『백범일지』에 “고금도의 충무공 전적지, 금산의 7백 의총과 승병 영규의 비 등을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고 적기도 하였다.

    그 다음 행선지는 여수・순천・보성・광주・함평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김해・창원・진주・전주・목포・군산・강경 등지도 시찰하였다.

    광주 백화마을

    1946년 보성을 떠난 김구가 도착한 곳은 광주였다. 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선생환영기념강연회’가 열렸다. 당시 광주시장인 서민호씨가 환영 인사를 하면서 귀국동포 전재민戰災民들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자 김구는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금으로 받은 선물・해산물・육산물・금품 등을 모두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기증했다.

    당시 귀국동포 전재민들은 1920년~30년대 광주천 정비사업으로 학동 8거리 일대에 조성된 갱생촌에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서민호 광주시장은 김구의 희사금을 종잣돈 삼아 개생촌 850평의 대지에 4~4.5평의 작은 건물 100여 가구를 세워 전재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에 김구는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백화百和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딸린 남루한 집이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옆집에서 소곤대는 귀엣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재민촌이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마치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졌다며 ‘말집’이라 불렀다.

    김구는 지방순사를 다닐 때마다 받은 돈과 물품을 그곳의 전재민을 위해 기탁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김구의 관심과 애정을 각별했다.

    1948년 10월 1일 김구는 광주를 다시 찾아왔다. 당시 남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의 정부를 수립한 직후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김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남북의 갈등이 시작되던 때였다.

    김구는 10월 1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 ‘삼균주의청년단’ 개소식에 참석해 분단과 남북한의 대립을 규탄하며 평화통일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