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창암昌巖이다. 안동 김씨 익원공파 21대손으로 한양에 살던 김구의 집안은 ‘김자점의 옥獄’으로 인한 화를 피하기 위해, 황해도로 피신하여 신분을 감추고 살았다.
창암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바꿔먹거나, 집에서 몰래 돈을 갖고 나와 떡을 사먹으러 가는 등 유난스러운 개구쟁이로 자랐다. 12살이 되어 신분차별을 깨닫고 양반이 되고자 본격적인 과거공부를 하였다. 17살에 황해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당시 과거장의 타락상을 보고 양반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공부를 하였으나, 자신의 얼굴이 좋지 않음을 알고 비관에 빠졌다.
하지만 관상서에 ‘사람은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는 구절을 보고, 평생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마음 좋은 사람에 대해 고민하던 창암은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신분의 차별 없이 어울려 사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이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창암은 주저없이 동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자는 뜻에서 이름도 창암에서 창수로 바꿨다.
창수는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이끌었다. 이후 지방 조직의 우두머리인 접주가 되었고,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지만 패배하였고, 이때 안태훈 진사는 적장인 창수를 아꼈으며 창수는 안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평생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시던 고능선을 만난 것도 안태훈의 집에서였다. 고능선은 황해도의 대유학자였던 인물로 안태훈이 동생과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시고 있었다. 창수는 고능선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고능선이 청을 받아들이자 창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1928년 상하이에서 「백범일지」를 쓰면서 “오늘까지 30여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고선생이 나를 사랑하시고 심혈을 기울여 구전심수하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수상한 일본인을 만난 창수는 조선인 행세를 한 일본인이 ‘국모를 시해한 자가 아닐까?’, ‘그자가 아니더라도 그 공범일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저놈을 죽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국가의 치욕을 씻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왜놈을 처단하기로 하였지만,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섣불리 손을 썼다가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문기둥에 서있는 왜놈을 발길로 차서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손목을 밟으니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칼을 집어 왜놈을 처단하였다. 이후 '국모보수國母報讎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였노라'라 쓰고 그 밑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밝혀 포고문을 붙여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후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온갖 고문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 직전 고종의 명으로 중지되었고 탈옥하여 전라도 지역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