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범어록 중에서 -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세는 민족주의 세력과 친일·반민족세력, 좌익과 우익, 미·소를 등에 업은 정치인의 헤게모니 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어 갔다. 김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김구는 이에 굽히지 않고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 들어 주변에서는 암살을 걱정하였으나, 김구는 “나는 나라를 위해서 왜놈들이 죽일 일은 했어도, 내 동포에게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며 일축하였다. 6월 26일 경교장에서 울린 네발의 총성은 평생을 나라와 민족만을 사랑했던 김구의 생명 뿐 아니라, 조국 통일의 염원도 앗아갔다. 친일 반민족 세력의 하수인,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된 김구는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년 후, 김구의 예언은 적중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오랜 세월 통일을 위한 노력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백범 암살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시기에는 암살자 안두희가 정권의 비호 아래 백범 암살의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1960년 4월 학생혁명 이후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다양한 증언들이 폭발적으로 나타났고, 국민과 여론은 안두희 체포와 진상 규명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5·16군사쿠데타로 그 진상규명을 위하여 국가 차원의 협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정부는 진상규명을 위하여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진실을 파헤치려는 신문기자들, 역사학자들,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 등의 희생적인 활동으로 사실은 거의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민간차원의 노력들은 다방면에서 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 스스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구해 왔고, 그 요구가 이번 국회 조사활동으로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불 수 있다.
암살범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다.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장은산은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이후 김창룡이 적극 개입하였고, 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사후 처리를 주도하였다.
백범 암살에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사건에 대한 사전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우선 백범의 정치노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미국 역시 백범 암살에 대한 구체적 지시나 명령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암살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지시 명령의 대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최고위층 자체가 하나의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제 백범 암살사건의 전반적 윤곽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이 할 일이다. 그들의 할 일은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하루 빨리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세워야 할 것이다.
1995. 12. 18
백범 김구 선생 암살진상규명진상보고서 중에서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