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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KBEOM CULTURAL FOUNDATION

    백범白凡, 김구

    김구는 구국운동기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위한 비밀화합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였고, 자금을 모금하던 중 1911년 ‘안악사건·105인사건’으로 4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4년 김구는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백범白凡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의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에서 지은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고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한국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구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경무국장을 맡았다. 경무국장은 임시정부를 수호하고, 교민들을 보호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정치적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 독립운동 자금의 곤란, 대통령이 미국에 있으면서 현지에 부임하지 않은 것 등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고, 정부의 명의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1925년 3월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무령을 행정수반으로 삼아 활기를 모색하였다. 김구는 이상룡·홍진에 이어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혼란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동지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해결하는 상황에서도 김구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호소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김구는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였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 의거,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결행하여 독립운동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유상근·최흥식의 관동군사령관 처단과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처단을 계획·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는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장제스 정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는 군대를 편성하여 대일전쟁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인적·재정적 곤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충칭에 정착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겨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미국의 OSS와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이란 이름으로 공동 작전을 추진하였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이 국내에 투입되어 적후방공작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의 훈련이 완료되었고 국내에 투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했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38선을 경계로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38선 이남은 미군정이 통치하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최고 5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구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결론은 한국은 자주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신탁통치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미·소가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여기에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마저 분단될 상황이었다.

    미·소간에 합의를 이루지 못해 신탁통치는 실현되지 않은 대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고 UN은 남북한 총선 실시를 위해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으나 소련군이 위원단 입국을 거절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김구는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고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는 평양에서 남북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남북한 모두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고 절규하였다. 회의를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결정서·공동성명서 등이 채택되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